어머니는 만주 가서 산의 나무를 다 자르고 밀어 논밭을 만들었대요. 농사짓고 거기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대. 우리 어머니는 정말 여장군 같아요. 일꾼 일곱명 두고 농사짓는데, 거기서 하루에 12가마씩 밥을 지어서 독립군들에게 먹였대요. 무관학교 교관이고 체육교사였던 아버지가 밤늦게 여러 학생들을 데려오면 밥 다 해먹이구. 어렸을 때 생각하믄 마당이 무척 넓고 그 안에 학교가 또 하나 있고, 대문 쪽에 총 쏘는 건물을 만들었어. 건물 밖으로 지나가면서 일본 놈하구 싸우려고, 대문이 있구 무척 넓어요. 학교 마당 같아요. 옆에는 학교라해서 가서 애들 공부하구....(김명섭, 「용인지역 3대독립운동가연구 서설-오희옥 여사 인터뷰」『용인향토문화연구』5집, 2003)
오광선-정현숙 일가는 이 곳에서 화전을 일구고 옥수수와 조를 심어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쌀을 구할 수 있을 때는 1년에 한번, 설날 뿐이었다. 교관인 오광선이 밤이건 새벽이건 갑자기 부하들을 데려와 밥을 먹였기에 집안의 식량은 매일 비었다고 한다.
이렇게 헌신적인 독립군 뒷바라지를 한 정현숙 여사가 얻은 별명은 ‘만주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이렇게 정성을 들인 학교는 점차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좌경화됨에 따라 1927년 청년강습소로 개칭되고야 말았다. 그러자 교장인 여준과 교관 오광선 등은 더 학교에 머물지 않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토교에서도 정씨는 홀로 삼남매를 키우느라 늘 궁색한 처지로 형편 필 날이 없었고, 백범은 오광선의 가족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다....이들에 비하면 영걸 어머니 정씨는 아무래도 고생이 심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영걸 어머니에게 정을 쏟고 희영이나 희옥이에게 좀더 잘해 주려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영걸 어머니는 만주에서 농사를 해본 경험도 있고, 몸도 건강해서 내 밭일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나는 그 대신 그집 삼남매의 옷가지 손질이며 일부자리 만들기 등 주로 바느질 일을 도와주었다.
정현숙 여사는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이 결성되자, 그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에 가입하여 임정 활동에 참여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오희영과 희옥 자매 역시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선전활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광복군에 입대해 초모공작 등에 활약하였다.
오희영은 먼저 광복군에 입대하여 초모공작 등에서 활약했고, 동생 희옥도 공립중학교 3학년 다니다가 광복군에 지원하였다. 특히 맏딸 희영은 광복군 징모처 제6분처에 소속되어 최전선인 부양(埠陽)으로 가 일본군에 맞서면서 선전활동과 초모공작에 투입되었다. 당시 16세의 오희영이 최전방에 자원하던 때를 지복영(池復榮)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어느날 중경에 갔던 김학규 지대장이 서언 한국광복군총사령부로 오희영을 데리고 왔다. 오희영은 나보다 여섯 살 아래로 이제 겨우 16세였다...오희영은 만주로 아버지 오광선을 찾아가기 위해 최전방을 자원했다. 그것은 바로 적후(적 점령지구) 공작을 뜻했다. 어린 나이에 성패를 예측할 수 없는 그 험한 길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참으로 한국의 딸로, 망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너나없이 서럽고 또 서러웠다.(지복영 지음 이준식 정리, 『여성 한국광복군 지복영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 민족문제연구소, 2015)
이후 오희영은 중경 임시정부로 가 1944년 김구 주석의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김구 주석의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申宋植, 1914~1973)과 혼인하여 ‘부부광복군’의 모범을 보였다. 장남 오영걸은 구술하기를 부친이 북경에서 잡혀간 후 주로 김구와 이시영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며, 누님 오희영의 결혼식에 김구 주석이 주례를 서 주었다고 기억하였다. 신송식은 혼인 후 1945년 6월 임시정부 주석 비서로 임명돼 부부가 함께 활동하였다.
오광선은 1938년 10월 출옥한 이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흑룡강성 하얼빈 인근의 대석하와 흥안령지역에서 항일 빨치산들과 만나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는 만주 각 곳을 편력하면서 지하활동을 꾀하다가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을 맞이하게 되었다.